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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중반 나이로 항일 전사가 된 소년 무당 [김종성의 '히, 스토리']

时间:2024-03-29 20:48:51 出处:종합읽기(143)

10대 중반 나이로 항일 전사가 된 소년 무당 [김종성의 '히, 스토리']

[독립운동가외전] 소년 동학군 최동린▲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기록화. ⓒ 한국문화재재단 월간 문화재 갈무리
10대 중반 나이로 항일 전사가 된 소년 무당 [김종성의 '히, 스토리']
130년 전인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전라도 고부민란으로 촉발된 동학혁명(동학농민전쟁)은 엄청난 희생자를 낳았다. 아사히신문사가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정리해 일본어 외에 한국어·중국어·영어로도 발행한 후쿠다 히로키(福田宏樹)의 <역사는 살아 있다>는 "농민군 측의 희생자는 만 명이라고도 (하고) 5만 명이라고도 말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10배에 달한다는 설도 유력하다는 말을 복수의 전문가로부터 들었다"고 기술했다.
10대 중반 나이로 항일 전사가 된 소년 무당 [김종성의 '히, 스토리']
모든 시대를 다룬다는 의미의 통사(通史)가 아니라 비통한 역사를 다룬다는 의미인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역사학자 박은식은 동학군의 전투를 개략적으로 요약하며 "그들 무리들은 주둔하고 있던 여러 지역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저항하였으나 고전하였다"라며 "8, 9월에 이르기까지 사망자는 3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10대 중반 나이로 항일 전사가 된 소년 무당 [김종성의 '히, 스토리']
이 부분에서 박은식은 음력을 사용했다. 그가 말한 "8, 9월"은 양력이 아니다. 처음에는 조선 정부군을 상대로 반봉건 혁명에 나섰던 동학군은 음력 9월 10일인 양력 10월 8일부터 일본을 상대로 반외세 혁명을 전개했다.
동학군은 반봉건 혁명 때는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다가 반외세 혁명 때는 열세에 놓였다. 박은식이 언급한 '30만'이 정확하다고 확단할 수는 없지만, 동학혁명 발생 시점부터 음력 9월까지의 사망자는 일본군과의 대결이 본격화된 음력 9월에 주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음력 9월 뒤에 일본군의 공세가 강화됐으므로, 박은식의 기록에 따를 것 같으면 전체 희생자 규모는 30만 명을 훨씬 넘게 된다.
세상을 올바로 바꾸겠다며 일어선 사람들의 희생이므로 그 어느 하나 안타깝지 않은 희생이 없겠지만, 그중 하나인 10대 동학군의 최후는 짠한 울림을 줄 만하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해 운영되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아래 심의위) 홈페이지에 소개된 최동린(崔東獜)의 최후가 그렇다.
어린 나이에 리더십 갖게 된 결정적 이유
▲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장흥군청
이 홈페이지는 동학혁명 당시 최동린이 13세였다고 말한다. 이와 달리, 전남 남해안인 장흥군 관산읍 남송리에 소재한 장흥동학농민혁명군묘역 안내판에는 17세로 적혀 있다. 구한말에 작성된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제6권에 수록된 동학군 토벌 기록인 <동학당 정토약기(東學黨 征討略記)>에는 "16~17세"로 적혀 있다.
심의위 홈페이지는 "석대들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나주 일본군 진영으로 압송"된 뒤 처형됐다고 설명한다. 심의위가 펴낸 <동학농민혁명일지>에 따르면, 지금의 전남 장흥군 장흥읍에서 석대들 전투가 일어난 날은 1895년 1월 10일(음력 12월 15일)이다. 최동린이 붙들린 것은 이 전투 직후가 아니다.
그것은 석대들에서 퇴각한 농민군이 장흥군 관산읍 옥산에 재집결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뒤였다. 위 안내판은 "이 전투 과정에서 17세의 소년 장수 최동린이 일본군의 총에 다리를 맞아 낙마하여 학송에서 은신하다 체포되어 나주로 압송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장흥 내에 은신해 있다가 체포돼 나주로 압송된 뒤 처형을 당했다.
최동린이 10대 나이로 동학군 부대를 지휘한 배경을 알려주는 단서들이 있다. '낙마'했다는 이야기가 그중 하나다. 말을 탈 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말을 타고 전투를 지휘할 정도였다면, 말을 탄 지가 여러 해 됐을 수밖에 없다. 일반 남성들에 비해 체력이 잘 단련됐으리라 볼 수 있다. 어릴 적에 승마를 배웠으니, 집안의 경제력도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동린의 막내동생의 아들로 태어나 최동린 사후에 그의 양자로 입양된 이가 있다. 장흥 지역신문인 2017년 11월 27일 자 <장강뉴스>에 89세로 표기된 최재호씨가 바로 그다. 제목이 '동학농민혁명 장흥 지역인물 삶의 여정과 후손에 끼친 영향 6'인 이 기사에서 최재호씨는 자신의 친부가 아버지와 형(최동린)이 죽은 뒤 "많던 재산"을 다 빼앗겼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동학군의 주력 부대는 소작농들이었다. 이들에 비해 최동린은 나이와 관계없이 지역 내 지위가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다가 승마로 단련된 신체적 조건이 그를 동학군 대장으로 만드는 요인이 됐으리라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에 더해, 보다 결정적인 다른 요인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당 정토약기>는 최동린이 존경받는 박수무당이었다는 판단을 가능케 만든다. 이 기록은 장흥 동학군을 진압한 일을 기술하면서 이렇게 썼다.
"최동자(崔童子)라고 하는 자가 있었다. 역시 동학도들이 그를 우러러 받들어 신으로 모신 것이다. 이 자의 연령은 16~17세인데 노새를 타고 비도(匪徒)를 지휘하다가 때마침 장흥에서 군에 의해 다리에 총을 맞고 일어설 수 없으므로 이도 역시 병원에 집어넣었다."
최동자로 표기됐지만 최동린에 관한 기록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동학도들이 신으로 떠받들었다고 했다. 그 시절 사람들이 신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은 신성한 혈통으로 간주되는 왕족이거나 아니면 신비한 능력을 타고난 종교인이었다. 왕족이 아닌 민간인이 신처럼 숭앙된다면 대개는 영험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최동린은 동학에 입교한 소년 무당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그가 어린 나이에 리더십을 갖게 된 결정적 이유를 알려준다.
의심의 여지 없는 항일 전사
▲ 박홍규 화백의 <동학무명농민군>ⓒ 박홍규
위 기사에 "역시"라는 표현이 두 군데 있다. 장흥의 동학 부대를 이끈 또 다른 지휘자인 이소사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하다가 사용된 표현이다.
<동학당 정토약기>는 이름을 알 수 없어 기혼여성에 대한 존칭인 소사(召史)를 붙여 이소사로 불린 이 여성에 관해 "그 여자 동학은 사실 미친 사람이었는데, 동학도들이 옹립해서 천사로 만들어 이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소사의 영적 능력은 잠시 뒤 언급될 일본 <국민신문>에도 언급돼 있다.
이소사의 실체를 모르는 외국 군인들의 눈에는 주문을 외는 그가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신녀로 보이는 이소사와 소년 무당으로 보이는 최동린이 장흥의 동학군 부대를 지휘했다는 것은 이 지역 동학도들이 동학 교리보다는 무속에 더 많이 좌우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최동린이 1895년 연초의 석대들 전투 이전부터 상당히 유명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서가 1895년 3월 5일 자 <국민신문>에 들어 있다. 이 기사는 이소사의 영적 능력과 동학전쟁 참전을 설명한 뒤 "어쩌면 또 작년의 신동(神童)과 같은 걸까"라고 말했다.
이소사를 언급한 뒤 최동린을 '동자'로 표기한 <동학당 정토약기> 기록을 감안하면, <국민신문>에서 이소사를 언급한 뒤에 사용한 '신동'이란 표현은 최동린을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령한 능력을 가진 아이라는 의미로 부른 것을 보면 최동린이 맞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소사가 "작년의 신동"과 같은 유형의 인물일까 하고 말했다. 이는 최동린이 이소사보다 먼저, 그리고 장흥전투 이전부터 일본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판단을 갖게 만든다. 반외세 혁명으로 전환된 1894년 10월 이후로 일본군의 주목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동학당 정토약기>에 따르면, 최동린은 붙들린 뒤 발목 절단 수술을 받았다. 그런 뒤 10대 중반 나이로 일본군의 처형에 의해 순국의 길을 가게 됐다. 그렇게 그는 1만이라고도 하고 5만이라고도 하고 50만이라고도 하는 동학군 희생자의 한 사람이 됐다.
최동린은 국가보훈부의 공인을 받는 독립유공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의심의 여지 없는 항일 전사다. 그는 1875년 운요호사건(강화도사건) 이래 조선을 침탈해 온 일본제국주의가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킨 1894년과 1895년에 일본군과 싸우다 부상을 입고 순국한, 틀림없는 독립유공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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